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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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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12-쥐며느리 쥐며느리 아이들은 제 이름 뒤에충(蟲)을 덕지덕지 붙였다.급식-충… 문과-충… 벌레의 집단의식콩벌레를 닮은쥐며느리가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듣고 쥐 부인도 쥐 아내도 아닌쥐며느리가 시어머니도 없이잔뜩 몸을 웅크리며 서러워 울고야 마는데 그해 모든 생명의 꼬리엔나풀거리는 이름값이 달렸다.저벅저벅하교하는 벌레들…
습작 11-신호등이 점멸한다 신호등이 점멸한다 21세기 고양이를 찾습니다보드라운 털 둥글한 엉덩이와 코 쥐는 못 잡구요 이름은 몰라요 아마도 야옹이…이곳이 고향입니다 1868년 신호등이 데뷔했다.고양이는 번쩍거리는 불빛을 보며 생애 처음 나비 꿈을 꾸고그것이 감히 안전하다고 착각하여함부로 야옹 어리석게 야옹 인류는 붉은 광휘를 발명하고객사에 둔감하지 말기로 합의했다.죽음을 비추는 불빛이 길 위를 수놓으며 이제서야 도로 위에서 부끄럽게 죽지 말자고 서로를 다독였겠지 부끄럽게 죽어버린 존재가 일차선에 裸身으로 대놓고 서 있는데 점멸하는 신호등 불빛은 건방지게 왈츠를 추고 야옹 야옹 전멸하는 생의 외침
습작 10-새해 새해 베란다 실외기 모서리 끝에 누군가 둥지를 트고 있어 까막까치도 집을 샀대요. 왱왱 시끄럽게 돌아가는 굉음 사람이 뿜는 마찰음과 파찰음 참새가 없어진 방앗간을 찾다 죽어서 짹- 소리를 냈다. 까치야 네 설날은 어저께였다지? 참새야 황새 쫓다 가랑이 찢어질라 날지도 못하는 닭은 어떻게 십이간지가 되었니? 올해는 까마귀와 제비 사이에서 헷갈리지 않을게 다정하고 무정한 안부의 신년사. 시트러스 향 자음 쇼팽의 모음 따뜻해진 기류는 철새를 간지럽히고 새해는 새만이 듣는 해.
습작 9-물 위에 수놓은 언어 물 위에 수놓은 언어 유리알 거짓말을 명조체가 아니라 고딕체로 썼다 21세기의 모험 조판의 세계 가름끈은 어디에 둘까? 아버지는 내 이름을 모르고 맴맴
습작 8-지구는 70%의 슬픔과 30%의 부조리로 구성됐다 지구는 70%의 슬픔과 30%의 부조리로 구성됐다 어찌됐든 우리는 한 번의 제대로 된 선택으로 지구에 빌어먹고 살고 있다 아주 운 좋은 행복과 거대한 울음 사이 방랑자 지구는 70%의 슬픔과 30%의 부조리로 구성됐다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삼면이 슬픔으로 둘러 쌓였는데 엄밀하게 말해 그것은 연민과 고독, 수치심이지 나는 어릴 때부터 수치심과 가까운 지방에 태어났다 낯 부끄러운 줄 모르고 관용과 은유를 잃어버렸다 공든 탑이면 항상 무너졌다 하위 주체는 재현될 수 없다
습작 7-강아지에게 강아지에게 멍멍 왈왈 낑낑 깽깽 바우와우 독독 킁킁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하루를 기다리는 많은 울음 진동으로 쓰는 편지가 들린다 잉잉 크게 소리 내어 울게 엉엉 흑흑 앙앙 다양한 울음을 토한다.
습작 6-정오 정오 사람과 인간 사람과 사랑 사람과 사랑과 사라짐 모두 까무룩 음울한 단어 금세 휘발되겠지 사람도 사랑도 사라짐도 뚜껑을 야물게 닫아야 해 그것이 제 발로 나가는게 아닐텐데 몸 한 쪽이 덜컥 잘려 덜렁 떨어지고 나뒹구면 생의 외침을 표음할 수 없을 때 정오가 시작한다
습작 5-사랑은 훌쩍 눈물은 줄줄 사랑은 훌쩍 눈물은 줄줄 무해한 밥상 위 죽음은 없다 나는 엄마의 유일한 숨 쉴 구멍 고해성사는 성당 신부님에게 성흥사 미륵보살에게 엄마는 제 생애 잠시 초대한 손님이에요 언제든 돌아가야 할 길이라는 걸 건방지게 잊지 마세요 꼭꼭 씹었다 꿀꺽 삼켰다 사랑은 훌쩍 눈물은 줄줄 울음과 얼음 사이에서 신음을 참음
습작 4-종이심장 종이심장 프린트는 장당 흑백 50원 컬러 200원, 양면인쇄 4분할로 심장을 인쇄한다 합리를 놓치기 싫어 괜히 흑백으로 인쇄한 나는 이만큼 옹졸하지요 두 눈을 부릅뜨며 손끝으로 짚어 보는 동맥과 정맥 눈에 보인 활자를 누르며 그 속의 진심을 읽으려 해 너무 작고 어두워 보이지 않은 마음은 예리했다 베인 손끝으로 따갑고 쓰라린 상처가 벌겋게 입을 벌리고 적혈구와 백혈구가 가랑이를 벌린 채 제 몫을 하겠지. 심장은 너무 쉽게 구겨지고 바스락 더듬으며 흑백 심장의 構造만 읽는 거야 심장은 활개해 피는 흐르다가도 넘치지 쿵쾅거리는 動態는 꽝꽝 얼은 凍太 우리는 심장도 없이 서있는 모두 두 눈 시퍼렇게 떠 있는 장님
습작 3- 더러움의 역설은 깨끗함이 아니다 더러움의 역설은 깨끗함이 아니다 더러워서 피하다 더러우면 피해야지 더럽기에 한 없이 고고한 저 고개 깨끗이란 지긋지긋 더러움은 미움과 노여움 두려움이 움트는 마음 친히 옆으로 피해주는 이 모습은 부정 不正 아닌 모정 慕情 더러움의 여운과 그리움이 있더라?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엽다지 모든 사랑은 더럽다. 모든 성교는 더럽다. 모든 타인은 더럽다. 우리는 모두 더럽게 태어났다. 피임없이 탄생했고 한 개인의 장기를 짓누르며 이기적이고 더러운 성질머리의 寶庫 우리는 모두 더럽기에 서로의 사랑에 관하여 가타부타 논하지 말아야 한다.